시대유감..'남부럽지 않은 삶'과 '남부끄럽지 않은 삶'

오로지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보자는 소박한 희망을 위해 모두가 소위 '근대화의 역군'으로 매진했다.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음을 남들도 인정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중간은 된다고 아니,
선진의 문턱에 왔다고 큰 소리도 치게 되었다.
이러던 것이 엊그제인데, 오늘은 모두가 '총체적 난국'이라 야단들이다.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된 모습이 왜 난국인가?
늙은이들은 젊은이들의 싹수가 노랗다고 외면하고,
그 젊은이들은 지난 세월을 중고품 값도 쳐주지 않는다.
남자들은 굼벵이에도 정력이 솟고, 여자들은 작부보다 야한 차림에 '호스트바'를 찾는다.
가진자들은 제 몫 늘리기에 혈안이고 그것을 과시하는데 안하무인이다.
빼앗긴 몫을 찾는 사람들은 금도끼까지 잃었다고 떼거지로 아우성친다.
나랏일을 맡은이들은 떡고물부터 챙기고,
백성들은 힘겨루기 좋아하는 자들과 민족의 이름내세우는
자들의 혀끝에서나 빛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배우는 학생들의 목숨은 시험지 몇 장의 값어치도 못되는데,
어린 것들은 '바람 風'의 본조차 받을 수 없다.
이것이 '남부럽지 않은 삶'의 모습이다.
남부럽지 않게 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겠으나,
불행히도 그것은 나와 무관하게 언제나 남이 가진 것이 기준이 되니
한도 끝도 없다.
거리에서 사람이 치여 죽고 칼 맞아 죽고, 누이가 돈에 팔려 다니고,형제가 환각 속을 헤매어도,
남부럽지 않기 위해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남부럽지 않게 살자면, 남의 자식 도시락을 빼앗아도,
불량식품으로 모두의 배를 채워도 좋다.
남의 땅 나라 땅 할 것 없이 들어 먹어도 좋고,
남부럽지 않은 집에서만 산다면 맹모삼천이 아니라
백천을 해서 자식이야 친구가 없고 게걸음을 쳐도 무방하다.
멀쩡한 남정네가 한창 나이에 죽어자빠진들 대수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위해서 우리는
'남부끄러운 줄 모르는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닌가?
교통사고율 세계 1위, 뇌물없인 되는 일이 없는 나라,
고아를 외국에 수출하는 나라, '데모크레이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나라, 용이 아니라 지렁이로 변하는 나라라고 남들이 부끄러움을 주어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남부럽지 않은 삶'을 위해 노력해 온 것들이 모두 헛된 것들은 아니었다.
절대 빈곤의 해소, 전반적인 생활수준의 향상(질적이 아닌 양적인),
국제적 지위의 향상, 지속적 발전 역량
축적 등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르게 나누어지지 않고 소외와 갈등을 심화시켜온 것도 또한 사실이다.
우리의 진정한 자아의 실현은 남과 더불어 할 때 이루어진다면,
좀 더 더불어 살고 있는 남들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남부끄럽다는 것이 그저 눈치나 보는 좀스러움만은 아닐 것이다.
주체적 삶이란 남을 기준으로 삼아 남을 부러워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남과 더불어 남을 위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남부럽지 않은 삶'보다는 '남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자.
원래 우리 조상들은 남부끄럽지 않은 삶을 위해서 목숨도 초개같이 여겼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