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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리밭 학원농장

comus 2006. 4. 15. 04:14

청보리밭 학원농장…들녁엔 '초록 그리움'

 

가령 이런 곳. 이른 아침 잠을 깨우는 새소리가 있고 창문을 열면 푸른 언덕이 보이는 곳.

슬리퍼를 신은 채 언덕을 따라 오르면 종달새가 후드득 하며 날고 노란 장다리꽃이 봄바람에 흔들리는 그런 곳.

이런 곳이 있을까 싶지만, 실제로 있다. 지금 학원농장으로 가면 그림엽서에서나 보던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거닐 수 있다.

새벽, 잠을 깨운 건 새소리였다. 창문을 열었다.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묻은 보리밭은 한층 푸르게 빛났다. 보리 이삭에 매달린 둥근 빗방울이 길다란 잎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슬리퍼를 신고 우산을 받쳐들고 보리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갔다. 후드득 하고 보리밭 사이에서 종달새가 날아올랐다. 아득한 지평선 너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보리밭 둑을 따라 노랗게 핀 장다리꽃이 흔들리고 보리밭이 몸을 뒤쳤다. 보리밭은 마치 파도를 타듯 이편에서 저편으로 푸르게 요동쳤다.
 
학원농장.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 산 119의 2번지에 자리잡은 이 농장은 개인 소유의 보리밭 농장으로는 가장 넓다. 무려 13만평. 고 진의종 국무총리의 아들 진영호씨(54)와 나란희씨(51) 부부가 지난 93년부터 운영해오고 있다.

대기업 이사까지 지냈던 진씨는 농장 경영을 소원하다 맘먹고 학원농장을 일궜다. 이 넓은 땅을 어떻게 부부가 운영할 수 있을까. 해답은 기계식 영농에 있다. 파종은 트랙터로 하루 만에 끝내고 수확은 콤바인으로 보름 만에 마무리짓는다.
 
보리밭은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때. 4월 초부터 머리를 디밀기 시작한 보리 이삭은 무릎보다 높이 자라 있다. 보릿대에도 생기가 넘친다. 보리밭 주위로는 토끼풀과 찔레꽃이 만발했다.
 
푸르름의 농도도 요즘이 가장 짙다. 마치 언덕에 푸른 물감을 쫙 뿌려놓은 것만 같다. 이달 중순부터 익기 시작한 보리는 말쯤이면 누렇게 익어가고 6월10일께 수확한다. 누렇게 익은 들판도 볼 만하다.
 
학원농장 입간판부터 시작된 산책은 천천히 걸어 굵은 노송이 몸을 비틀며 서 있는 곳까지 이어진다. 중간중간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을 만난다.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이 다정스럽다. 남자가 봄비에 헝클어진 여자의 귀밑머리를 매만져준다. 여자의 손에는 노란 장다리꽃 한송이가 쥐어져 있다. 데이트 장소로 이만큼 낭만적인 곳이 있을까.

보리밭 산책은 화창한 오후도 좋지만 안개가 잔잔히 서린 새벽 무렵도 상쾌하다. 걷노라면 여기저기에서 종달새가 지저귄다. 이슬을 머금은 보리 이삭은 한층 싱그럽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조금의 수고만 더한다면 학원농장 봄 여행은 기쁨이 두배가 된다. 지금 학원농장에 가면 쑥쑥 커가는, 넉넉하게 익어가는 계절을 만날 수 있다.

어느 갠 날, 구릉 뒤덮은 가을


◇고창 학원농장 메밀밭

고창땅은 언제 찾아가도 정겹다. 천년고찰 선운사와 도솔암 숲길은 그윽하다. 산비탈을 한 굽이 돌면 넉넉한 구시포 앞바다가 펼쳐진다. 이맘 때의 선운산에는 꽃무릇도 무더기로 피어난다. 봄의 신록과 여름 바다, 가을 단풍, 겨울 설경까지 사계절 모두 만족을 주는 곳. 올해는 볼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산그늘에 무서리처럼 하얗게 내려앉은 메밀꽃. 초가을 정취를 느끼기에 제격이다.

메밀밭이 들어선 곳은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 학원농장이다. 봄에는 푸른 보리로 넘실댔던 밭고랑에 이젠 메밀꽃이 만개했다. 젖무덤처럼 완만한 구릉은 청보리만큼이나 짙푸른 하늘을 이고 있다. 메밀밭은 마치 구름이 내려앉은 것 같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대를 보고 있으면 꽃멀미를 할 것같이 어지럼증이 난다.

올해 조성된 메밀밭은 학원농장 17만평 중 4만여평. 비록 농장의 일부라고는 하지만 메밀밭을 한번 돌아보는데 30분 이상 걸릴 정도로 드넓다.

메밀밭에서는 다른 식물들을 찾아볼 수도 없다. 파종부터 재배까지는 불과 두달뿐이지만 워낙 번식력이 강하기 때문에 잡초조차 끼여들지 못한다. 메밀밭 바로 옆의 콩밭에 잡초가 무성하게 올라온 것과 대조적이다. 붉게 익은 수숫대가 물고랑을 따라 댓그루씩 서서 메밀밭의 경계를 나누고 있을 뿐이다. 밭고랑 한가운데 아득하게 보이는 수십년 묵은 소나무 세 그루는 밭고랑이 얼마나 드넓은지 짐작하게 해준다.

메밀꽃밭은 순백으로 환하다. 한송이를 떼어내 놓고 보면 마치 강냉이 튀밥처럼 보잘 것 없지만 들판을 뒤덮고 있는 메밀꽃은 눈 쌓인 들판 같다.

‘내마음 지쳐 시들 때 호젓이 찾아가는 메밀꽃밭/슴슴한 눈물도 씻어내리고/달빛 요염한 정령들이 더운 피의 심장도/말갛게 씻어 준다//그냥 형체도 모양도 없이 산비탈에 엎질러져서/둥둥 떠내려오는 소금밭/아리도록 저린 향내/먼산 처마끝 등불도 쇠소리를 내며/흐르는 소리…’(송수권의 ‘메밀꽃밭’)

학원농장의 메밀꽃은 9월초부터 피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까지 메밀꽃이 이어진다. 꽃머리부터 피기 시작해서 폭죽 터지듯 꽃대를 타고 내려오며 꽃망울을 터뜨린다. 농장주 진영호씨(55)는 “올해 장마로 파종이 늦었기 때문에 강원도 봉평보다 1주일 정도 늦게 꽃이 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진씨는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장남. 대기업에서 이사까지 지냈지만 이제는 농군 티가 완연하다. 학원농장은 어머니인 이학 여사(83)가 처음 개간했다고 한다. 1960년대엔 이런 곳에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했을 정도로 잡목만 무성했던 야산. 마을 사람들이 땔감이나 얻었던 불모지를 사서 개간했다. 원래 두루미가 많이 날아들던 곳으로 황새골이라 불렸다. 학원(鶴苑)이란 이름도 학이 많다는 뜻이다. 어려서부터 농군이 꿈이었던 그는 92년 사표를 쓰고 들어와 농군이 됐다.

원래 학원농장은 보리밭으로 더 유명하다. 그의 보리밭은 개인농장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컸다. 진씨는 몇해 전부터 메밀을 조금 시험재배하다가 올해는 4만평으로 늘렸다. 이곳에서 수확한 메밀은 가공공장이 많고, 업체도 많은 봉평으로 팔려나간다. 성장이 빠르고, 김을 매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따로 일손이 필요없다. 진씨는 판매처만 확보되면 13만평의 농장 전체에 메밀을 심을 계획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전국 최대의 메밀꽃밭으로 봉평만큼이나 명소가 될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비산비야의 구릉지대에 펼쳐진 학원농장 메밀밭은 지평선이 하늘과 바로 맞닿은 듯 정겹다.

선운산에서는 꽃무릇을 볼 수 있다. 꽃무릇은 꽃과 잎이 따로 피는 까닭에 상사화로도 불린다. 꽃무릇은 선운사 들머리 개울가부터 피어 있다. 고창군청에서 조성한 꽃밭. 굽은 것 하나 없는 꽃대, 왕관처럼 벙그는 꽃잎, 황금빛 수술을 매달고 있는 꽃술. 뚝뚝 쪽물이 떨어질 것 같은 파란 활엽수 아래 붉은 꽃밭이 대조를 이룬다.

상사화엔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먼 옛날 토굴에서 용맹정진하던 스님이 있었다. 어느날 불공을 드리러 온 여인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 스님은 가슴앓이를 하다가 결국 상사병으로 쓰러졌고, 그 자리에서 붉은 꽃이 피어났다. 이 꽃이 바로 상사화라고 한다. 절 주변에 상사화가 많은 것은 스님들이 탱화를 그릴 때 상사화로 물감을 만들었기 때문. 상사화 뿌리를 짜낸 즙을 칠하면 좀이 슬지 않고 색도 바래지 않는다고 한다.

상사화는 도솔천 길을 따라 도솔암으로 이어진다. 숲그늘 짙은 도솔천 물그림자에 비친 꽃모습이 환상적이다. 마치 초파일 연등을 달아놓은 듯 길이 환하다. 백제 위덕왕 때인 577년 세워진 선운사, 동학의 비기를 꺼냈다는 마애불,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수령 600년의 장사송을 볼 수 있다.

볼거리 가득한 고창땅. 하얀 메밀꽃과 붉은 상사화가 꽃향기를 내뿜으며 가을을 불러들인다.

◇여행길잡이

원농장을 찾아가는 길은 조금 복잡하다. 서해안고속도로 고창IC에서 빠지자마자 3거리에서 법성포 방면으로 우회전하면 15번 지방도. 5분 정도 달린 뒤 3거리 갈림길에서 선운사 대신 무장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다시 만나는 공음(무장)·동호 3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무장 방면 796번 지방도. 무장읍내 6거리에서 공음 방향으로 꺾어 4㎞를 달리면 계동 버스승강장이 있다. 그 옆에 한자로 쓰인 ‘학원농장(鶴苑農場)’ 돌 표지판이 서 있다. 표지판이 크지 않아 지나치기 쉽다.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는 정읍IC에서 빠져 22, 23번 국도로 고창읍에 들어가거나, 백양사IC로 나와 15번 지방도로를 이용해 고창읍에 닿는 방법이 있다. 대중교통은 서울 강남 센트럴시티에서 고창까지 고속버스를 탄 뒤 군내 버스로 무장까지 간다. 무장읍내에서 택시를 이용하면 6,000원 거리. 학원농장 (지역번호 063)564-9897.

원농장에 객실 5개가 있다. 4만원부터. 선운사 관광단지에 숙박시설이 많다. 석정온천(564-4441)은 게르마늄 온천으로 피로를 씻기 좋다. 선운사 입구의 풍천장어가 고창의 으뜸 먹거리. 연기식당(562-1537)은 29년째 풍천장어를 판다. 예전엔 갯벌가의 허름한 집이었는데 몇해전 새로 지었다. 고창읍내 천변의 조양관(508-8381)은 이름난 한정식집. 문을 연지 60년이 넘는다고 한다. 7,000원, 1만5천원, 2만5천원짜리가 있다.

밀밭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 무장읍성이 있다. 갑오농민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곳. 고부에서 봉기했던 농민군이 자진 해산하자 관군은 약속을 어기고 동학교도들을 잡아들였다.

전봉준은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과 태인의 김개남, 원평의 김덕명 등과 함께 1894년 무장에서 거병했다. 무장읍성은 4,000명의 농민군이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아 백성을 살려내자는 창의문을 쓰고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던 현장이다.

18일부터 4일동안 선운산 일대에서 풍천장어와 꽃무릇축제를 연다. 고창군청 560-2225, 선운산도립공원 563-3450. 우리여행사(02-733-0882)는 20일 고창 메밀밭과 꽃무릇 여행을 떠난다.